다양한 법 분야 중에서 가정법은 사실 많은 변호사들의 선호 분야가 아닙니다. 대체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가정문제를 다루는 분야일뿐더러 이혼소송으로 들어가면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니라는 것이 기본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물 일류 변호사를 고용해서 소송에 이긴다고 해도 몇 분간의 승리감이 있을 뿐 곧바로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준 변호사의 수임료를 계산할 일이 다가옵니다.
가정법 변호사로서 저도 절대로 합의하지 않고 반드시 재판으로 가고야 말꼤다는 의뢰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줍니다. "이혼 과정을 통해 볼 꼴 못 볼 꼴 다보고 마음이 상해서 정말 한번 크게 이겨보고 싶은 맘이 간절한 것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무조건 재판으로 가자고 하면 결국에는 양 측 변호사들에게만 좋은 (?) 일 해주는 겁니다. 합의하지 않고 재판해서 맘에 드는 결론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봤습니다. 설사 재판에 이긴다 해도 엄청난 액수가 수임료로 나갈 거니까요. 차라리 조금 뒤로 물러서서 합의하고 수임료로 날릴 뻔한 그 돈으로 사랑하는 아이와 여행도 가시고 먼 훗날 대학 등록금으로도 저축하시고 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 이 대사는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로스쿨 시절 가정법원 판사님 밑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판사님께서 막무가내로 재판까지 가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마디 마디 맞는 말이라서 제 의뢰인들에게 그대로 되읊곤 합니다.
그런 이렇게 합의를 권하는 일에 예외가 있다면 바로 가정 폭력 사건들입니다. 가정 폭력 사건으로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한 경우에는 피해자들에게 쉽사리 합의를 권하지 않습니다. 조금 편하자고, 수임료 조금 절약하자고 피해자의 안전에 관한 사항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접근 금지 명령 신청서를 접수한 후에 1-2 일후에 임시 접근 금지 명령이 나오게 되고 그것을 받아든 가해자와 그의 변호사는 피해자나 피해자의 변호사에게 합의를 요청합니다. 여기에서 합의란 경찰에 가해자의 신상정보가 입력되게 되는 CLETS 명령을 취하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사적인 합의 사항을 만들어 양쪽이 서명한 후에 법원에 파일하자고 권하는 것을 말합니다. CLETS 명령은 법원에서 임시 및 장기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지는 경우, 가해자의 인적 사항이 경찰 시스템에 입력되어 만일 가해자가 접근 금지 명령에 기재된 사항을 위반하는 경우 즉각적으로 형사처벌이 가능한 명령입니다.
NON-CLETS PERSONAL CONDUCT ORDER 이란 말 그대로 경찰이 관여되지 않고 양쪽이 서로의 행동을 자제하기로 약속하는 것에 대한 명령입니다. NON-CLETS 명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경찰에 체포되거나 형사처벌이 가능한 게 아니고 법원에 가해자의 위반 사항에 관하여 contempt (법원 명령 위반) 를 파일해서 담당 판사에게 가해자의 위반 사항을 알리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파일한 후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그 위반사항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공판일이 정해지고 그때 가서 판사에게 위반 사실을 알리고 처벌해달라고 요구하는 거지요. 따라서 위반하자 마자 어떤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명령의 효력이 아무래도 CLETS 명령보다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고 피해자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큰 효과가 없다고 봅니다. 믈론 조항 중에 위반사항이 알려지자마자 곧바로 CLETS 접근 금지 명령에 대한 재신청에 들어간다는 조항을 넣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위반하기로 작정하는 사람에게는 큰 효력이 없다고 봅니다.
많은 가해자들이 이러한 NON-CLETS 명령을 얻어내기 위해 또다른 묵언의 협박을 가합니다. 예를 들어, NON-CLETS 로 바꿔준다면 이혼 소송에서 배우자 부양비를 더 주겠다, 재산 분배에서 더 유리하게 해주겠다, 임시 배우자 부양비를 두 배로 주겠다, 양육비를 더 올려주겠다 등등. 많은 경우에 피해자들이 경제적으로 불리한 점을 이용해서 돈을 가지고 합의를 해보려고 하는 거지요. 실제로 피해자들은 이러한 경제적 조종에 쉽게 말려들고 불가피하게 NON-CLETS 명령으로 바꿔주기도 합니다.
물론 가정 폭력 접근 금지 명령이란 경제적 부양에 관한 문제로 신청하는 것이 아니고 피해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신청을 취소하고 NON-CLETS PERSONAL CONDUCT ORDER 로 바꾸고자 할 때 판사는 반드시 그 이유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해자의 새로운 위협과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것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NON-CLETS PERSONAL CONDUCT ORDER 로 바꾸는 이유가 가해자가 경제적으로 이득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유를 댄다면 애당초 가정 폭력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한 이유 자체가 가정폭력 때문이 아니고 가해자로부터 돈을 더 받으려는 속셈이었다는 의심까지 받게 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상황이 바뀌어 더이상 위험하지 않게 되었다고 이유를 둘러대고 명령의 종류를 바꿔 버립니다.
그러나 일단 NON-CLETS 명령으로 바뀌고 나면 실질적으로 명령을 위반한다고 해도 당장 그 행위를 처벌할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일단 피해자의 안전이 위협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더불어 위반사항에 대한 처벌이 훨씬 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대체로 위기모면으로 내놓은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2차적 피해를 막기 위해 법원에서는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비영리단체에서 나온 직원들을 배치해서 CLETS 접근금지 명령을 NON-CLETS 로 바꾸려는 피해자들과 상담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 법의 근본인만큼 피해자 본인이 강하게 원한다면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지요.
제 의뢰인들도 접근 금지 명령 신청 과정을 지나가면서 수없이 저에게 묻습니다.
"변호사님 차라리 합의하고 신청을 취소할까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데 지금 저렇게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마다 저는 그분들과 애당초 처음에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하게 된 이유를 다시 한번 되돌아봅니다.
왜 무엇때문에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접근 금지 명령 신청을 하게 되었는지. 왜 그 오랜 세월을 참다가 간신히 신청하게 된 건지. 그간 무슨 일들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을 뒤흔들어놓았는지. 그리고 과연 지금 당장 잡근 금지 명령 신청을 취소하거나 CLETS 에서 NON-CLETS 로 바꿔도 오늘밤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지.
CLETS 에서 NON-CLETS 로 바꾸어도 오늘밤 아무 걱정 없이 두려움 없이 잠자리에 드실 수 있었던 분들은 애당초 접근 금지 명령이 필요없던 분들입니다. 따라서 신청 목적 자체를 다시 돌아보고 접근 금지 명령을 악용해서 이혼에서 조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나쁜 목적이 아니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법원이 이런 거짓말에 속을지 몰라도 그 거짓말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이용해서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한 사람들은 오히려 큰 코를 다치는 길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위험이 뻔하고 단 하룻밤도 발뻗고 자기가 어려울만큼 위험한 가해자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받고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견디지 못해 불가피하게 가해자의 합의 요청에 응해주고 NON-CLETS 명령으로 바꿔주고자 하는 분이라면 변호사인 저도 너무나 안타깝고 막막해집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경우 저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안전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이상 절대로 합의할 수 없고, 이런 식의 경제적인 지원 조건으로 합의를 유도하는 것은 또다른 학대라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사실을 심리공판때에 판사에게 알려서 가해자들에게 쐐기를 박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압박해오면서 합의를 종용하는 가해자와 합의하시고 싶을 때마다 도대체 왜 처음에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하게되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세요. 그리고 과연 합의하고 난 후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만큼 모든 상황이 변한건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세요. 그래도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담당변호사의 조언을 귀담아 들으세요. 변호사가 없는 분들은 가까운 지역 내의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비영리단체를 찾아가시고 현재 상태의 여러가지 위험성에 대해 그분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으세요.
가정 폭력 접근 금지 명령으로 인해 가해자의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명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자제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행동이 실질적으로 바뀌는 데에는 매우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